아우슈비츠 - 비르케나우 박물관 설립에
기부한 국가들 중 많은 기금을 낸 국가들 몇 곳 소개 합니다.
참고로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이 박물관 설립에 기부 하였습니다.
독일 - 6 천만 유로 ........... 79,353,060,000 원
미국 - 1500 만 달러 .......... 16,132,553,938 원
폴란드 - 1 천만 유로 ........ 13,225,510,000 원
프랑스 - 5 백만 유로 ......... 6,612,755,000 원
오스트리아 - 4 백만 유로 ..... 5,290,204,000 원
영국 - 210 만 파운드 ......... 3,169,215,000 원
스위스 연방 - 1 백만 유로 .... 1,322,551,000 원
이스라엘 국가 -1 백만 달러 ... 1,075,503,535 원
러시아 연방 - 1 백만 달러 .... 1,075,503,535 원
아우슈비츠 수용소(Auschwitz Concentration Camp)는
예정에 없었지만 크라코프에서 가까워 방문하게 되었습니다.
그러다보니 제 2수용소는 빼 먹는 등 내용이 부실 합니다.
제 2수용소인 비르케나우 수용소는
제 1수용소에서 무료셔틀이 운행된다고 합니다.
박물관 내에서는 사진을 못 찍는다는 안내문이 때문에
앞서 말씀드렸던 가방, 식기, 브러쉬, 신발외에
모포나 양복의 안감으로 사용하였다는 여자들의 머리카락,
벽에 걸려 있던 수감자들의 사진 등은 담아오지 않았는데,
대부분 사진 촬영이 가능하다고 합니다.
- 5번 블럭 입니다. 여기도 여러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는데,
4번 블럭의 사진과 헷갈려 어떤 사진들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안나지만...
- 복도 끝에 걸린 사진은 시체를 태우는...
저건 화장(火葬)이 아니고 태우는 것 입니다.
- 창 너머 철조망과 담장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.
돌이켜보니 단체 관람객이 아닌 개인이라 좀 자유로워던...
- 수용자들의 생활을 볼 수 있는 6번 블럭 입니다.
복도에는 수용자들의 이름, 직업, 수용소 입소날짜, 사망일이 적혀 있는 증명 사진들과
앙상하게 뼈만 남은 여자 수용자들의 참담한 사진들도 볼 수 있습니다.
수많은 사진 중에 16살의 나이에 2달 사이 둘 다 사망했던
쌍둥이 자매가 나란히 있던 사진이 아직도 기억 납니다.
사진을 찍을까 말까 많이 망설이다 그냥 와서 더 기억에...
- 7번 블럭에서는 수용자들이 사용했던 화장실, 침구 등을 볼 수 있습니다.
6번 블럭이였는지 7번 블럭이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,
해골에 가까운 모습을 한 수용자들의 조각상이 있었습니다.
- 1942년 12월부터 여성의 생체 실험이 있었다는 10번 블럭,
여기도 오픈되어 있지 않았습니다.
- 10번 블럭과 11번 블럭은 담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.
블럭 사이에는 총살형이 행해졌다는 마당이 있습니다.
- '죽음의 벽'이라고 불리우는 총살시 수감자들이 서 있던 자리.
수감자들이 사형선고를 받으면 이곳에서 총살을 시켰는데,
1941년부터 1943년 사이에 수 천 명의 사람들이 총살을 당했다고 합니다.
- 10번 블럭의 수용실의 창문은 이렇게 가려져 있습니다.
- 죽음의 블럭으로 알려진 악명 높은 11블럭.
다른 블럭과는 달리 특별 관리되는 수감자들이 있었던 곳으로
11번 블럭을 나가는 방법은 죽음 뿐 이였다고 합니다.
-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도면 등이 전시 되어 있던 곳 입니다.
- 21번 블럭은 1940년에서 1945년 까지 네덜란드에 거주하던
유대인에 관한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.
'안네의 일기'를 쓴 '안네 프랑크'에 관한 사진을 확인 못했네요.
- 15번 블럭에도 많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.
총살 직전, 교수형 후의 사진들을 볼 수 있는데,
죽기 전 사람들의 표정을 찍은 사진도 볼 수 있습니다.
위에서 언급했던 쌍둥이 자매를 볼 때도 그랬지만,
조금만 감정이입을 해도 그냥 눈물이...
- 12번 블럭 앞에 있는 휠체어가 눈에 들어 한 장 담았습니다.
- 게슈타포의 캠프가 있었던 곳에 세워진 특별한 교수대 입니다.
저항운동에 가담하거나 탈출을 준비한 수감자들을 심문하던 곳으로,
고문으로도 많은 수감자들이 사망했다고 합니다.
아우슈비츠의 첫 번째 사령관이였던 루돌프 호세(Rudolf Höss)는
전쟁이 끝난 후 바르샤바의 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고,
1947년 4월 16일에 저 교수대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고 합니다.
- 아우슈비츠에 끌려온 유대인의 수는 130만 명이였고
그 중 110만 명이 학살 되었다고 합니다.
사망자의 90% 이상이 유태인이였다고...
- 아우슈비츠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가스실로 가는 길에 담았습니다.
- 전쟁전엔 탄약 벙커였던 건물을 화장장와 가스실로 개조하여
1940년 8월 15일에서 1943년 7월까지 화장터로 사용하였는데,
1941년 가을에 화장터의 가장 큰 방을 가스실로 만들었다고 합니다.
- 가스실과 화장장으로 들어 갔지만 내부 사진은 찍지 못했습니다.
- 역사의 현장에 왔다는 들떤 마음으로 담았던 철조망이지만,
아우슈비츠를 나서며 담았던 철조망은 말 그대로 먹먹한 마음이였습니다.
- 반대편의 풍경도 한 장 담고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여행을 마쳤습니다.
기억 합시다.
'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'는 단재 신채호 선생님의 말씀을...
캐논 G7X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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